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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선동열은 야구에서의 국보다. 국보란 문화재 가운데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인 가치가 가장 큰 것을 말한다. 그만큼 야구선수 가운데 가치가 가장 큰 선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인 해태 타이거즈 / 선동열

아마 시절부터 이미 국제적인 선수로 인정 받은 선동열은 이미 82년도 세계선수권 우승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했다.

해외로의 관심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현재처럼 시장이 자유롭지 못했고, 스카우터나 스캇 보라스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 결국 국내 잔류를 하게 된 선동렬은 한국화장품과 해태와의 이중계약 파문으로 전반기 징계를 받고 후반기부터 출전하게 되었다.

첫 프로경기에서 삼성라이온즈와의 선발로 나서 7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이어가다 8회에 5실점으로 데뷔 경기를 마치면서 패전을 안았다.

시즌 첫해 성적은 평균자책점 1위(1.70), 피안타율 1위(0.187)를 기록하며 7승 4패 8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선동렬 선수가 못 받은 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신인왕. 당시 신인왕은 프로 입단 동기생인 이순철( .304 타율, 12 홈런, 31 도루) 이 받았다.

전성기 해태타이거즈 / 선동열(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은 당시 해태타이거즈의 상징이자 우승 전력의 첫 번째였다.

최고 구속이 150Km대 였으며, 체력이나 제구력이 뛰어났고, 또한 배짱까지 투수가 필요한 자질은 전부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통산 방어율 1.20으로 0점대 방어율만 3차례 기록하였다. 타이틀로는 리그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트리플 크라운 4회, 방어율왕 8회, 다승왕 4회 등의 역대급 기록과 타이틀들을 가지고 있다. 

상대팀이 이기고 있어도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상대 타자들이 기가 죽었을 정도라고 하니, 타자들이 시합에서 선동렬에게 느낀 중압감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주니치에서의 선동열(나고야의 태양)

국내에서 최고점을 찍은 선동열은 1996년 그토록 바라던 일본에 진출 했다. 한국 프로선수로는 처음 일본에 진출했기에 당시 국내에서는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러한 부담감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 인지 자기 볼을 던지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선동열은 “자고 나면 국내로 돌아가야겠다, 1년 내내 시합에서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인터뷰했다.

일본리그에서 첫해 5승 1패 3세이브(38경기, 방어율 : 5.50) 최악의 성적을 낸 선동렬은 다음 해인 1997년에 1승 1패 38세이브에 평균자책 1.28로 부활했다.

1999년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하며 선수로써 마무리했다. NPB 통산 성적은 10승 4패 98세이브(ERA :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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