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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때부터 외야수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30-30클럽과 호타준족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 리틀 쿠바 박재홍 선수입니다.

데뷔 첫 해 30-30 등록

광주제일고를 나온 박재홍 선수는 92년 신인지명에서 광주 연고 팀인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후 연대 사회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96년 다시 해태로 입단할 것으로 예상했었으나, 지명권과 당시 현대의 투수 최상덕과 트레이드하는 방식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하게 됩니다.

ⓒ나무위키

입단 첫 해인 96년 30개의 홈런과 36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해당 시즌에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한국 최초 30-30클럽에 가입하게 됩니다. 당시 30-30 클럽은 일간 신문 메인을 장식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기록이었다.

그 해 만장일치로 신인왕에 오르게 되고 MVP까지 예상되었으나,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구대성이 투수 부분 4관왕을 차지하면서 신인왕, MVP 동시 석권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음 해인 97년도에는 부상으로 인해 30경기나 결장했으나, 준수한 성적(타율:.326, 27홈런, 69타점)을 거두게 됩니다. 98년도에는 인천 연고지의 첫 우승을 이끌게 되고, 두 번째 30-30 클럽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99년에는 한해 개인 최고 만루홈런을 기록하고, 2000년에는 세 번째 30-30 클럽과 동시에 개인최다홈런(32)과 타점왕(115타점)으로 커리어하이를 찍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잦은 부상으로 01년/02년도에는 전성기 때의 성적에는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광주를 거쳐 다시 인천으로

02년도 시즌을 마친 후 당시 강력한 4번타자를 원했던 기아 타이거즈와 현대 유니콘즈의 이해관계가 맞아 03년도에 기아로 트레이드를 하게 됩니다. 이적 후 첫해 03년도에 햄스트링 부상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성적(타율.301 19홈런)을 내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04년도에 부상이 재발하면서 73 경기만 뛰게 되고, 동시에 선수단/프런트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다시 시즌을 마친 후 다시 인천으로 가게 됩니다.

05년도 그해 3할대 타율과 18 홈런 등 대부분의 타격 지표에서 TOP 10안에 들고, WAR 5.51을 기록하는 등 SK의 중요 타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05년도 시즌이 끝난 후 FA가 된 박재홍 선수는 중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소속구단인 SK와 다시금 계약을 합니다. 

FA 이후 06/07/08년도에는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중요한 순간에 유효한 안타를 치는 등 높은 WAR을 보여 주었으며, 특히 07년 08년에는 2년 연속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일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은퇴식

09년도 롯데와의 벤치 클리어링, 한국시리즈 수비 실수 등 어려움이 많았던 한해를 뒤로하고, 시즌 후 SK와 FA 재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FA 재계약 이후 3년간 한해 80경기 정도만 소화를 하고 2군에서의 생활이 많아지면서 12년도를 마지막으로 은퇴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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